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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 <George Duke 조지듀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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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듀크 – 경계를 춤추는 영혼의 키보디스트

 조지 듀크의 음악을 듣다 보면 장르라는 울타리가 얼마나 좁은 것이었는지를 새삼 깨닫게 된다. 재즈에서도, 펑크(funk)에서도, R&B에서도, 심지어 록의 거친 영역까지—그는 어디에 있든 자신만의 색을 바람처럼 흘려넣었다. 조지 듀크는 단지 건반 연주자가 아니라, 음악이라는 행성 전체를 여행한 탐험가였다.

 

1946년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난 듀크는 어린 시절 교회에서 울려 퍼지던 소울풀한 음악을 들으며 자연스레 건반과 친해졌다. 그의 첫 기억은 “피아노 위에서 노래를 듣는 것”이 아니라, “피아노가 스스로 노래하는 순간을 바라보는 것”에 가까웠다. 음악은 그에게 외부 세계가 아니라, 내면에 이미 존재하는 풍경을 꺼내는 과정이었다.

 

 버클리와 샌프란시스코 주립대를 거치며 재즈의 체계를 몸에 익힌 뒤, 그는 일찌감치 장르를 넘어서는 연주자로 불리기 시작했다. 다만 그가 선택한 길은 재즈의 정통성을 고집하는 길도, 유행에 따라가며 음악을 가볍게 다루는 길도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음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고, 그 모든 요소를 하나의 풍부한 언어로 다시 빚어냈다.

 

 그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문장은 단연 **프랭크 자파(Frank Zappa)**와의 만남이다. 자파는 듀크가 가진 유머감각, 기교, 그리고 무모할 만큼 열린 감수성을 꿰뚫어 보았다. 자파와 함께한 시절은 듀크에게 거대한 실험실과도 같았다. 복잡한 변박, 재즈의 자유로움, 록의 에너지, 그리고 파격적인 사운드 조합 속에서 듀크는 자신도 몰랐던 영역을 발견해 나갔다. 그는 자파의 밴드에서 건반을 치며 웃고, 노래하고, 때로는 경계선을 과감히 부수는 법을 배웠다.

 

 그러나 조지 듀크가 단순히 실험적인 아티스트로만 기억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보컬리스트였고, 프로듀서였고, 무엇보다 따뜻함을 잃지 않는 이야기꾼이었다. 솔로 활동을 통해 그는 보다 부드럽고 감성적인 R&B·퓨전 재즈의 세계로 스스로를 확장했다. “Sweet Baby”와 같은 곡은 사랑스러운 멜로디와 미려한 코러스, 그리고 듀크 특유의 부드러운 건반 터치가 어우러진 그의 대표적 세계였다. 그것은 자파 밴드의 실험성과는 전혀 다른 결, 그러나 조지 듀크라는 한 사람 안에 공존하는 또 하나의 진실이었다.

 

 1970~80년대, 그는 스탠리 클라크(Stanley Clarke)와 함께 퓨전 재즈의 심장을 건드렸다. 두 사람이 함께한 프로젝트는 화려하면서도 인간적인 에너지를 품었다. 테크닉의 과시가 음악의 목적이 아닌, 그 테크닉을 통해 즐기는 것 자체가 중요한 시대—조지 듀크는 그 중심에서 자연스럽게 빛났다.

 

 무대 위의 듀크는 늘 웃고 있었다. 그는 음악을 통해 사람을 기쁘게 하는 일을 진심으로 즐겼다. 그래서 그의 연주는 한없이 자유롭고, 동시에 인간적인 온기를 지닌다. 건반을 두들기며 리듬을 타는 그의 모습은 그 자체로 관객에게 하나의 ‘축제’를 선물했다.

 

 하지만 그의 생애에는 깊은 슬픔도 자리한다. 평생의 동반자이자 진정한 친구였던 아내 코린(Corin)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는 오랫동안 음악에 집중하기 어려워했다. 무대에 서서 웃고 춤추던 남자였지만, 마음 한쪽에는 사랑을 잃은 상처가 오래도록 남았다. 그럼에도 그는 음악으로 다시 돌아왔고, 자신의 감정을 곡과 멜로드에 담아 더욱 진솔한 연주를 들려주었다.

 

 2013년, 조지 듀크는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의 이별은 조용한 퇴장이 아니었다. 그가 남긴 음악은 여전히 수많은 장르의 뮤지션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키보드 한 대로 재즈를 넘어 세계를 건넜던 그는 우리에게 음악이 얼마나 넓고 깊을 수 있는지를 몸소 증명했다.

 

조지 듀크의 생애를 한 문장으로 정의하라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경계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만이 진짜 자신의 음악을 남긴다.”

그의 건반이 멈췄을지라도, 그가 남긴 그 경쾌한 웃음과 다채로운 선율은 오늘도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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